海外各国からGCへ留学中の学生が、日本での学びをレポート。
日本で出合った新鮮な体験を生き生きと伝えます。
2019.07.22
留学生として日本語を学んでいると、母語である韓国語と比べることが多いです。「日本語にはこういう表現があるんだ」「この感情をこう表現しているんだ」ということを考えながら、言語の差異に関心を持つようになります。韓国語の歌を聞いたら頭の中で日本語に翻訳してみたり、日本語の映画を観たら自分なりに字幕を考えてみたりします。このように翻訳と通訳は、いつの間にか日常の習慣となりました。
유 학생으로서 일본어를 배우다 보면, 모국어인 한국어와 비교할 때가 많습니다. ‘일본어에는 이런 표현이 있구나’,‘이런 상황에서는 이렇게 표현하는 구나’하며 생각을 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언어에 대한 감각이 늘게 되는 것 같습니다. 한국어 노래를 들으면서 머릿속에서 일본어로 번역해보기도 하고, 일본어 영화를 볼 때면 나름대로 자막을 상상해 보기도 합니다. 이렇듯 번역과 통역은 어느새 제 일상의 습관이 되었습니다.
通訳をする
私は今年の5月、特別な通訳をしました。大学の先輩、韓国の民族詩人である尹東柱(ユン・ドンジュ)についてのインタビューの通訳を担当したのです。尹東柱は1942年に同志社大学英文学科に編入し、彼が通っていた今出川キャンパスには彼の詩碑が残っています。時代を超えて多くの韓国人と日本人に愛されている詩人です。今回は、尹東柱の研究のために京都に訪れた韓国のキム教授と、個人的に尹東柱を愛し研究してきた奈良基督教会の井田牧師のインタビューを手伝うことになりました。
통역을 하다
저는 지난 5월, 무엇보다도 특별한 통역을 하게 되었습니다. 도시샤 대학의 선배, 한국의 시인 윤동주에 대해 인터뷰 통역을 맡게 된 것인데요. 윤동주는 1942년 도시샤 대학 영문학과에 편입한 한국의 시인으로 그가 다녔던 이마데가와 캠퍼스에는 아직도 그의 시비가 남아있습니다. 그만큼 여전히 많은 한국인과 일본인의 사랑을 받고 있는데요. 이번 통역은 윤동주의 연구를 위해 교토를 방문하신 한국의 김 교수님과, 개인적으로 윤동주를 사랑하고 연구해 온 나라기독교회의 이다 목사님 사이의 인터뷰를 도와드리는 것이었습니다.
通訳の難点
通訳を担当することになってから、私は心配事が絶えませんでした。通訳を専門的にやったことがないし、3時間以上のインタビューは負担感が大きかったからです。願ってもない機会なのに、私が引き受けてもいいのか、力不足ではないだろうかなど、罪悪感さえ感じるようになりました。もし 日本語力が未熟のせいで自分の意思をちゃんと伝えられなかったら、途中で内容を忘れちゃったら、敬語の使い方を間違えたらなど、最悪の状況をずっと想像しました。
통역의 어려운 점
통역을 담당하게 되면서 저는 걱정이 앞섰습니다. 통역을 전문적으로 해 본 적도 없었던 것은 물론 3시간 이상의 깊이 있는 인터뷰를 진행하는 것에 대해 부담감이 컸기 때문입니다. 놓치고 싶지 않은 기회였음에도 ‘내가 과연 잘할 수 있을까?’ ‘역량부족이 아닐까?’하는 죄책감마저 느끼게 되었습니다. 혹시 단어 선택이 미숙해서 뜻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하는 것은 아닐지, 도중에 내용을 까먹거나 반말을 써버리지는 않을지, 최악의 상황만을 계속 상상했습니다.
日本語コースの通訳の授業と通訳準備
このように落ち込んでいた私を助けてくれたのは、日本語コースの通訳の授業でした。これまでの通訳授業では、通訳に関する様々な理論的なことを勉強していたのです。その授業の資料をもう一度読み、単に理解しようとすることだけではなく、身につけようとしました。また、現場の様子を全く知らなかったため、授業が終わってからも通訳の授業の先生に色々なことを質問をしました。先生は、様々なコツを教えてくださいました。たとえば、通訳する内容を書き取りする場合、ノートを半分に分けて書いた方がいいということです。横で長く書き並べると、一目で把握することが難しくなり、内容が変わる区切りも示しにくいからです。また、通訳する内容について事前に十分勉強しておいた方がいいと言われました。関連のある語彙と内容を120%理解しておくことによって、本番の通訳で使いこなせるようになるからです。
先生のご助言の通り、まず、尹東柱について勉強することにしました。学校の図書館で尹東柱に関する書籍を読み始め、彼のハングル詩を私なりに翻訳してみました。どうすればもっと 言葉のニュアンスを忠実に伝えることができるか悩み、文学に関する語彙も英単語のように覚えました。そしてインタビュイーの井田牧師の経歴や彼が書いた尹東柱の論文など探して読むなど、通訳の準備に力を尽くしました。
일본어 코스의 통역수업, 그리고 통역준비
통역에 대해 막연히 불안해 했던 제가 도움을 받은 곳은 바로 학교의 통역수업이었습니다. 그 동안 통역 수업에서 여러 이론적인 것들을 공부해 왔기 때문에, 저는 수업 자료를 다시 한번 읽어보며 몸에 익히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또한 실전에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 수업이 끝난 후 따로 통역수업 교수님께 여쭈어 보기도 했는데요. 교수님께서는 저에게 여러 가지 유용한 노하우를 알려 주셨습니다. 예를 들어 통역할 내용을 받아 적을 때에는 노트의 한 페이지를 반으로 갈라 세로로 받아 적으라고 하셨는데, 그렇게 하면 가로로 길게 적는 것보다 한눈에 잘 들어오고, 내용의 변화도 쉽게 눈에 띄게 됩니다. 또한 통역할 주제에 대해 사전에 충분히 공부를 해야 한다고도 하셨습니다. 관련 어휘와 내용을 미리 120% 이해해 가야, 실전 통역에서 자연스럽게 사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선생님의 조언에 따라서 저는 먼저 윤동주에 대해 공부하기로 했습니다. 학교의 도서관에서 윤동주에 관한 서적을 읽기 시작했고 윤동주의 한글 시를 제 나름대로 번역해 보며 어떻게 하면 더 시어의 느낌을 살릴 수 있을지에 대해 고민했습니다. 시와 문학에 관련된 어휘들을 마치 영어단어처럼 외우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이다 목사님께서 쓰신 윤동주에 관한 논문이나 연구 실적도 찾아보며 통역 준비에 온 힘을 쏟았습니다.
通訳の当日
通訳は奈良基督教会で行われました。初夏の風が吹く中、インタビューが始まりました。キム教授と井田牧師の対話が始まると、私の手と耳と脳はすごく忙しく動き始めました。質問と回答をノートに簡単に書き取りながらも、頭の中では内容を分析し続けなければなりませんでした。そして直ちに韓国語を日本語に、日本語を韓国語に通訳しました。一言も逃してはいけないし、内容が理解できなくてもいけないという緊張感があったと思います。
この通訳をやっていく中で、多くのことを考えるようになりました。一言一言を伝えるたびに、「もっと適切な言葉があるのに」「こう言ったらよかったのに」と残念な気持ちを感じました。日本語だけの、または韓国語だけの独特な雰囲気を、他の言語で完全に伝えることに限界があったからです。また、尹東柱を愛して研究する牧師の話を聞いたら、同じ韓国人である彼についてよく知らなかったことが恥ずかしいと感じました。彼が書いた「星をうたう心で/すべての死んでゆくものを愛さなければ―<序詩>より」のように、彼が詩として表現した時代への悩みや懺悔が、時代を超えて私に伝えてきたからです。牧師は抗日詩人の尹東柱は、決して日本を憎んだことがなかったと言いました。日本の植民地の支配下でも、彼が見せてくれた平和への意志が、牧師の人生の転換点になったそうです。私も日本で勉強している一人の韓国人留学生として、その言葉が胸に深く残りました。
통역 당일
늦은 봄, 따뜻한 바람이 부는 통역당일이 다가 왔고, 이다 목사님께서 계시는 나라기독교회에서 인터뷰가 진행되었습니다. 김 교수님과 이다 목사님의 대화가 시작되자, 저의 손과 귀와 뇌는 아주 분주해졌습니다. 교수님의 질문과 신부님의 답변을 노트에 간단히 받아 적으면서, 머릿속에서는 내용을 계속 분석하고 이해하려 했습니다. 그리고 한국어를 일본어로, 일본어를 한국어로 통역하여 말을 전달했습니다. 한마디라도 놓치거나 내용을 이해하지 못하면 안 된다는 긴장감이 가득했습니다.
이렇게 통역을 하면서도 저는 많은 것을 생각했습니다. 한마디 한마디를 전할 때마다, ‘더 적절한 어휘가 있을 텐데’ 혹은 ‘말의 느낌을 살려 말했어야 하는데’하며 아쉬운 마음을 감출 수 없었습니다. 일본어만의 그리고 한국어만의 독특한 분위기를 다른 언어로 완벽히 전달하는 것에 한계를 느꼈기 때문입니다. 또 윤동주를 사랑하시고 연구하시는 목사님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한국사람으로서 윤동주에 대해 모르는 것이 산처럼 많다는 것이 부끄럽기도 했습니다. 그가 쓴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서시’와 같이, 그가 했던 고민과 참회가 제게 크게 다가왔습니다. 이다 목사님께서는 윤동주가 항일시인이면서도 일본을 미워하지 않은 평화의 시인이라고 하셨습니다. 일본의 식민지배 아래서 그가 보여주었던 평화에 대한 의지와 용서가 이다 목사님의 삶의 전환점이 되었다고 하셨습니다. 저 또한 일본에서 유학중인 한 사람의 한국인 유학생으로서 그 말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通訳が終わってから
インタビューが終わり、キム教授と私は通訳について沢山意見を交換しました。教授は意訳よりも直訳の方がいいとアドバイスをしてくださいました。ある程度の意訳は必要かもしれないが、通訳を聞く立場からは、やはり最大限の向こうの言うことを正確に聞きたいということです。インタビューの間、終始、もっと韓国語らしく、あるいはもっと日本語らしく意訳をしようと思っていた私には 目からウロコでした。そして個人的に、韓国語を日本語で伝えるのが、逆の方向よりもっと難しかったです。自分の発音に対する心配も多かったし、頭の中で韓国語を思い出しながら話した結果、話している日本語に韓国語が混ざってしまうこともあったからです。
通訳が無事に終わった後、私はその時になってようやく「私は私に小さな手を差し出して、
涙と慰安でつかむ最初の握手―<たやすく書かれた詩>より」ができました。これまでずっと悩んで心配ばかりした私をほめることがやっとできたのです。こんなにたくさんのことを学べる機会を得たのは、私にとって大きな祝福でした。
통역이 끝나고
인터뷰가 끝나고 김 교수님과 저는 통역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교수님께서는 의역보다는 직역이 더 낫다며 조언을 해주셨는데요. 어느 정도의 의역은 필요하지만 통역을 듣는 입장에서는 상대방이 말하려고 하는 바를 가능하면 정확하게 듣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더 한국어답게, 그리고 더 일본어답게 의역을 하기 위해 인터뷰 내내 고민했던 제게는 큰 깨달음이었습니다. 또 일본어를 한국어로 전달하는 것보다, 한국어를 일본어로 전달하는 것이 더 어렵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발음에 대한 걱정은 물론 일본어에 한국어가 섞여 나오기도 했기 때문입니다.
통역이 무사히 끝난 후, 저는 그제야 “나는 나에게 작은 손을 내밀어 눈물과 위안으로 잡는 최초의 악수 –‘쉽게 씌여진 시’”를 했습니다. 계속 고민하고 걱정해왔던 스스로에게 고생했다는 격려의 말을 건네며, 큰 성취감을 느끼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많은 것을 느끼고 배울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 것은 제게 아주 큰 축복이었습니다.
私にとって通訳とは
通訳は、ただ言葉を伝えるだけのものだと思っていましたが、今回の経験は私の価値観に大きい影響を与えてくれました。留学をしていても、周りの全てのことが日本語であっても、むしろ日本語の勉強は疎かになっていました。 留学をしている今より、留学をする前の方が日本語にもっと熱意があったと思います。しかし、通訳という韓国語と日本語の生々しい現場での経験は、私にとって大きな刺激になりました。2つの言語をもっと自由自在に使いこなし、将来、韓国と日本の架け橋になりたいと思います。私はこれからもずっと通訳を続けていきたいです。次回はもっとうまくできそうな予感がします。
내게 통역이란
통역은 그저 말만 전하면 되는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번 경험은 저의 가치관에도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지금까지의 유학생활에서 저는 안일해 질 때가 많았습니다. 주변의 모든 것이 일본어이고, 또 일본에서 생활하고 있다는 이유로 오히려 일본어 공부를 소홀히 했기 때문입니다. 유학을 하고 있는 지금보다 일본으로 유학을 하기 전이 훨씬 일본어에 대한 열의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직접 한국어와 일본어가 만나는 생생한 현장의 경험은 제게 큰 자극제가 되었습니다. 두 언어를 더 자유자재로 쓰면서 작게는 제 주변 친구들에게, 먼 미래에는 한국과 일본의 다리가 되고 싶다고 생각했습니다. 앞으로도 저는 계속 통역을 해나가고 싶습니다. 다음에는 더 잘 할 수 있을 것 같은 예감이 듭니다.
グローバル・コミュニケーション学部 日本語コース 2年 金隨玟(キム・スミン)
글로벌 커뮤니케이션 학부 일본어 코스 2학년 김수민